석유 시리즈 7편 - 내 맘대로 보는 석유의 역사 (4)
May 19, 2021
(이전 글과 이어집니다.)
World Wars
전쟁만큼 효율이 중요한 분야가 있을까. 석유는 석탄에 비해 단위 에너지 효율이 좋다. 영국의 처칠은 일찍이 이를 깨닫는다. 영국은 미국과 함께,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패권 전쟁과 석유 시대의 포문을 열어젖힌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대규모 전투에서의 화력 집중을 위해 세계 최초로 탱크가 등장했다. 또한 공중 군사 작전이 활발히 시행되면서 항공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새로운 수요의 등장으로 인해, 석유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운송연료로서의 가치를 완벽하게 인정받는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석유는 중요했다. 역사학자들이 히틀러의 패망요인을 분석 할 때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원인 중 하나가 자원수급의 불안정성이다. 물론 전선 이원화, 전격전으로 인해 길어진 보급선 등등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독일의 패전을 가져왔겠지만 말이다.
히틀러는 집권한 1933년 석유 생산을 늘리는 방법부터 찾는다. 석탄을 원료로 하여 만드는 합성 석유 생산 공장 건설에 매진한 결과 독일은 연간 450만 배럴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연간 석유 소비량 10억 배럴도 감당 가능한 수준의 생산능력이 있었다. 1938년 독일(4,400만 배럴)과 미국(10억 배럴)의 석유 소비량은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보통 스타크래프트 할 때, 전면전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미네랄과 가스 수급을 방해하는 견제가 아주 중요하다. 테란의 황제 임요환이 드랍쉽으로 벌쳐 4마리 태워서 폭풍저그 홍진호의 일꾼을 잡듯, 미국은 1944년 독일의 합성석유 공장을 폭격하여 말소시켜버린다.
이후 독일의 석유 재고는 0이 되고, 히틀러는 자살하고, 전쟁은 끝난다. 두 번에 걸친 세계의 전쟁은 모두 석유를 많이 생산할 수 있던 연합국의 승리였다.
Middle East Wars
2021년 5월 현재에도 중동은 조용할 날이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으로 인해 가자지구의 많은 민간인들이 내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망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List of modern conflicts in the Middle East’ 항목에는 1902년부터 2020까지 중동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무력 충돌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적혀져 있다.
중동의 모든 전쟁들을 석유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정치, 종교, 주권, 민족, 정당성 등 많은 키워드들이 복합적인 형태로 수많은 전쟁을 설명한다. 다만 석유는 중동 전쟁에 서방 국가들이 주목하는 단 하나의 이유이다. 중동의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어야 그들도 중동의 석유를 원활하게 쓸 수 있으니까.
‘N차 중동전쟁’이 그 예시이다. 영어로는 N-th Arab-Israeli War. 1차에서부터 4차까지 총 4개의 중동전쟁’들’이 있었는데, 보통 이스라엘 vs 아랍 국가들(이집트, 시리아 등)의 팔레스타인 점유를 사이에 둔 분쟁으로 시작한다. 이후 주변 국가들의 석유 이권이 화두에 오르게 되고, 이에 따라 다양한 국가들이 개입하는 양상으로 진행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중동-유럽의 석유 운송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여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려 했던 이집트로 인해 벌어진 2차 중동 전쟁(1956)은 세계사의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수에즈 운하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분이 있었는데,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국유화를 선언하자 양 국은 크게 반발하였고 평소 이집트와 사이가 좋지 않던 이스라엘까지 합세히여 영국 + 프랑스 + 이스라엘 vs 이집트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3개 국은 병력을 파견하여 이집트의 반절을 6일 만에 점령해버린다.
이에 우방국이었던 소련은 이집트를 감싸며 핵폭격을 하겠다는 위협을 가했는데, 반면 평소 같으면 영국 / 프랑스 / 이스라엘의 뒤를 봐주었을 미국이 세 국가를 돕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발을 뺀다. 미국이 발을 뺀 데에는 영국과 프랑스와 이스라엘이 미국과 상의도 없이 전쟁을 시작한 것에 분노한 것도 있겠지만 사실 ‘고작’ 수에즈 운하 때문에 소련과의 전면 핵전쟁을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군대를 파견하고도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가장 큰 손해를 봤다. 그리고 이 전쟁은 서방 세계의 패권이 영국 / 프랑스가 아닌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이 미국과 소련 같은 초강대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뭉쳐야 산다’라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한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헨리 키신저는 이 전쟁이 원수지간이었던 프랑스-독일이 서로 화해하는 계기였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1963년 독불 화해 협력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 조약은 EU의 출발점이 된다. 물론, 이후의 세계는 미국-소련의 양강체제로 흘러간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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